309일,
'1년. 내가 회고라는 걸 하기 위해 걸렸던 시간이다.' 라며 세상에 외친 후 이후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지금까지 꾸준히 나를 위해 시간을 써왔지만, 정작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은 갖지 못했다는 생각에 책을 덮고 이렇게 에디터를 켰다. 막상 쓰려니 그간 켜켜이 쌓인 경험과 생각, 감정들이 너무 많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지만, 원래 이곳은 가늠이 잡히지 않은 채 두서없이 쓰던 곳 아니었나. 늘 그랬듯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들을 나열하면서 그간의 시간들을 아카이빙해보고자 한다.
일단 오늘부터 시작해 보자
오랜만에 한강 산책을 하러 나왔다.
앞선 글들에 나와있듯 우리 집은 한강에서 고작 2분 거리에 있다. 모퉁이를 돌아 굴다리를 건너면 바로 한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시 찾아오기까지 반년 정도 걸리다니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오늘 나오기까지도 참 많은 고민들을 했다. '이 시간에 책을 읽어야 하는데', '내일 할 일도 미리 정리해야 하는데', '아 그냥 누워서 쉴까' 등 시시콜콜한 고민들을 모두 무찌르고 나가게 된 이유는 놀랍게도 '그냥'이다. 한강에 나서는데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까. 그냥 나가는 거다. 말이 참 쉽지 그동안 못 나간 이유는 결국 그 '그냥'이라는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렇게 나서 바라본 한강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도 없어 나와 한강,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이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화인가. 이 좋은 풍경과 기분을 왜 그간 즐기지 못했을까. 뭐가 그리 바빠서 이 쉬운 발걸음을 하지 못했을까. 아쉬움과 여유로움이 한데 섞여 걷는 산책길은 그럼에도 시원하고 상쾌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걷던 중, 문득 드는 생각 하나. '그래서 뭐가 그리 초조했을까?'
입사 후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회고글 이후 지금까지 꽤나 치열하게 달려왔다고 생각한다. 온보딩 기간을 마치고 조금씩 서비스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업무량도 늘어갔다. 잠깐 그동안 했던, 그리고 하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 검색 UI 도입
- 새로운 스타일 라이브러리(emotion) 도입
- 상세페이지 개편
- 서비스 퍼포먼스 개선 (lighthouse)
- 큐레이션 슬라이더 개편
- 글로벌 서비스 준비
- next.js 13 도입 준비
- 개발실 사내 발표
- 블로그 스터디, 원티드 next.js 강의 참여
- 사내 스터디 진행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저 리스트 하나하나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몰두해왔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오롯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닌 그 과정에 함께하며 아낌없이 조언해주고 도와준 팀원분들 덕분에 얻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언과 경험, 고민들이 더해져 10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분명 개발자로써는 조금이나마 성장한 듯 했다. 하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알 수 없는 혼란함 또한 같이 성장해가고 있었다.
담당하는 역할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제반 지식들이 필요해짐에 따라 이를 채우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졌다는걸 점점 체감하게 됐다. 그 때부터였을까. 마치 경주마에게 눈가리개를 씌운 듯 계속 앞만 보고 달리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무언가를 해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고 다음날 업무를 고민해가는게 일상이 돼갔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는 미래에 대한 고민도 수반하게 되면서 업무와 미래 이 두가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됐다. 처음에는, '나 참 열심히 살고 있다, 잘 하고 있다,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거다'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보내자며 다짐을 해왔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무언가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업무를 하다보면 막히는 일이 생길 때도 있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해 지적을 받을 때도 있다. 조금만 고민하고 시간을 투자하면 해결될 그런 하루의 소소한 이벤트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이벤트 하나하나에 초조하고 답답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차분함은 사라지고 혼란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열정이라는 불꽃은 어느새 감정의 불길로 번져갔다. 작은 자극에 예민해지고 퇴근 후가 고단하게 느껴져갔다. 물론 업무 중에는 티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척하려 부단히 노력했었다. '평온하려는 표정과 그렇지 못한 머릿속' 같은 것이랄까. 그리고 퇴근 후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스스로에 대한 압박은 계속해왔지만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해도 안한 듯하거나 아예 휴식을 줘야겠다는 핑계로 유튜브를 키곤 했었다. 그렇게 왜 혼란한지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채 불편한 상태로 침대에 눕곤 했다. 이 모든 상황들은 놀랍게도 나 혼자서 만든 상황들이었다.
이런 상황에 중간중간 팀장님과 여러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때 받았던 질문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한, 또는 감정에 대한 회고를 하는가?' 당시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도 매일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퇴근 후를 보내기에 사실이긴 했다. 다만 내가 했던 행위는 '얕은 생각'이었을 뿐, '깊은 고민'이 아니었기에 이후 다시 생각해봤을 때 제대로 된 답변을 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마주하던 퇴근길에서, '이번 주말에는 반드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들게 됐다. 스터디 준비와 업무 준비를 미루더라도 해야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나는 '온앤오프' 하고 있는가?
예전 방송 중 '온앤오프' 라는 방송이 있었다. 출연하는 연예인의 일과(온), 그리고 일과 후 일상(오프)에 관해 보여주는 관찰형 예능이었다. 방송이기에 그렇긴 하지만 온, 오프의 삶은 확연히 달랐다. 치열하게 본업을 마주하는 온의 모습과 대비되는 여유로운 오프의 모습은 연예인도 우리와 크게 다를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잠깐. '우리와 크게 다를바 없다'고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진정한 오프를 허락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업무라는 콘센트를 뽑아버리고 온전히 나를 돌아보며 그런 시간을 정작 언제 가졌던걸까. 왜 휴식이 필요할 때조차 스스로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채찍을 들었던 것일까. 왜 그렇게까지 무리하게 치열하려고 했을까? 부족한건 사실인데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까지 완벽함을 추구하려 했을까. 정작 완벽하지 않은데.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자 비로소 현재 내 모습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무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은 내려놓고 임해도 괜찮았을텐데, 조금은 나를 돌아보고 돌봤어도 됐을텐데 마음만 혼자 너무 급했고, 그 마음의 속도를 따라잡느라 계속 허덕였던 것이다.
다시 한강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생각은 대략 정리가 됐다. 하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다. 고민의 결과가 도출됐지만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을. 어쩌면 이 모든건 내 성향이나 살아오던 삶으로 오랫동안 구축된 모습일테니까 말이다. 여전히 성장을 위해 달려가긴 하겠지만 다만 이전과 조금 달라질만한 점이라면, 그동안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고 일주일, 또는 매 달마다 최소 한 번은 진정으로 '오프'하고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나를 아껴주고 돌봐주는 그런 시간말이다. 물론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그 시간동안 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그 추진력을 위한 무릎 꿇기 정도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친 하늘은 여전히 흐릿하고 비가 채우던 공기 중에는 찬 바람이 조금씩 감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바람이 지나가면 언제나 그렇듯 맑은 하늘이 찾아오는 법. 다시 이 곳을 찾아왔을 때는 시시콜콜한 일상으로 가득 채운 맑음만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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